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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툽의 과거에서 찾는 경제 이야기

잊힌 사람들을 위한 뉴딜- < 뉴딜정책 >

by 이파브르 2023. 4. 12.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1. 뉴딜정책이란?

1929년 터진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경제적 비상사태를 맞닥뜨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기 미국이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내놓은 일련의 정책들을 말한다. 흔히 회자하는 경제적 영향 외에도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장기적인 영향을 남겼고, 결과론적으로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게 한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2.뉴딜정책의 시작 배경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 불황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물가는 폭락하여 GNP를 1932년 당시 1929년의 56%로 떨어뜨리고 1,30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1932년,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정권 교체가 불 보듯 뻔한 시점에서 대통령 선거가 찾아오게 되고, 이때 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후보직을 수락한 루스벨트는 곧장 대선의 최대 이슈인 대공황 극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브레인트러스트(Brain Trust)라 불리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종의 정책 자문단을 만드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회와 부의 불균형, 경제적 불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겠다는, 즉 ‘잊힌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당선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레인트러스트의 자문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작이다.

3. 1차 뉴딜정책(1933~1935년)

  • 대공황이라는 사태에서 최악의 지지도를 달린 후버도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어서 정부의 재정 지원 등 대책은 강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도가 세진 않았고, 루스벨트는 이들을 본인의 정책으로 계승시키기는 하지만 연방정부의 역할이 훨씬 더 확대된 대대적인 회생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윽고 1933년 3월 백악관에 발을 들인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첫 100일"이라 불리는 기간 미국을 회생시키기 위한 법안들을 의회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 그중 가장 먼저 통과된 것이 연방정부가 대폭적인 지원을 해줌으로써 공황 상태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의 업무를 정상화하려 한 긴급은행법으로, 이와 함께 금본위제 중단을 통해 금의 유출을 막아 통화 안정과 유동성을 확보하는 한편 또다시 금융 시장이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제동 장치를 마련하는 증권법을 통과시켰다.
    • 두 번째로 민생 쪽에 대한 방편으로 나온 것이 우선 과잉생산으로 나락에 빠져있던 주요 농산물 가격을 생산 통제로 가격 안정을 노림과 동시에 직접적인 농업구제 원조의 길을 여는 농업조정법. 거기에 농업이 주요 산업인 동남부의 테네시강에 다목적댐과 발전소 건설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 창출과 전력 공급이 핵심이 되는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의 설립이다. 당시 동남부는 전기조차 들어와 있지 않은 지역이 수두룩한, 여전히 전근대적인 농경사회를 못 벗어난 낙후 지역으로 대공황의 직격탄을 그대로 맞은 곳이었다. 그런 이 지역에 전기를 들이고 농업의 현대화를 꾀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오늘날까지 개발공사가 유지되고 있다.
    • 1차 뉴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실업률 문제와 노동자 복지 문제이다. "첫 100일" 말미에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을 통과시켜 두 개의 기구를 설립한다. 첫 번째는 공공공사관리국(Public Works Administration)으로 연방정부 주도로 댐이나 다리 등 거대 공사를 일으켜 실업률을 떨어뜨리고 경제 활성화에 목적을 두었다. 한편, 전국산업부흥법은 행정부에 산업마다 공정경쟁규약을 통해 과도한 경쟁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의 보장을 명시했는데, 이러한 시장의 공정성과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두 번째 기구인 전국 부흥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이었다.

4. 1차 뉴딜의 위기

  • 정치적 차원에서 뉴딜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민주당 소속으로 사회주의적 포퓰리스트였던 흉이 롱(Huey Long)부터 정반대 성향의 상류층 지원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 인사에, 뉴딜 정책이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연방정부의 역할을 주장하는 인물 등 다양한 곳으로부터 도전받게 된다. 더불어 측근인 브레인트러스트도 의견 불일치 등으로 인사 교체들이 이뤄지며 몇몇은 아예 반 루스벨트로 돌아서기도 했고, 정책의 효과 또한 바닥을 치던 경제를 회복세로 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실업률은 크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그 와중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연방 법원의 뉴딜 관련 판결 문제였는데, 당시 연방 판사들은 루스벨트 이전 공화당 정권들에 의해 임명된, 뉴딜 정책과는 반대의 정치적 의견을 지닌 인사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이 여러 뉴딜 정책들 관련 판결에서 연방 정부의 개입에 위헌 결정을 때려버리며 전국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 등 1차 뉴딜의 핵심 정책들이 무산되어버린다.

5. 2차 뉴딜정책 (1935~1938년)

  • 1차 뉴딜정책에 더욱더 진보적인 과감한 뉴딜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뉴딜 정책을 대표하는 공공사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이다. 앞서 연방 긴급규제국이 별 재미를 못보다 담당자이던 해리 홉킨스가 아예 뉴딜 정책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광범위한 실업률 구제 사업으로 내놓은 것으로, 지방 정부들과의 연계를 통해 병원, 다리, 공원 등의 시설 공사에 투입될 비숙련직 일자리들을 창출하고, 여기에 더 나아가 음악, 미술, 연극 등 예술 산업에도 손을 뻗쳐 수많은 예술가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뉴딜 정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책으로 한창땐 330만명의 실업자를 고용 상태로 돌려놓는 경제적 영향은 물론, 상대적으로 소수이나 여성들 또한 일자리를 마련 받아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일부 흑인 예술가들이 정부 지원을 받아 예술계에 족적을 남기기도 하는 등 사회적 영향 또한 큰 정책이었다.
  • 전국산업부흥법을 이어받아 똑같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등 노동자 권리 증진을 발의한 전국 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을 내놓는 한편,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통해 국민들에게 연금 등 전반적인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는 복지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러한 정책들을 지원 사격하기 위한 Wealth Tax Act, 소위 부자 증세 혹은 부유세로 불릴만한 세제 개혁을 도입했다. 첫 임기 때 이미 63%까지 올린 소득세율 상한을 79%까지 끌어올린 이 정책은, 흉이 롱의 지지 세력을 루스벨트가 흡수하는 효과까지 낳았다.
  • 이러한 법안들은 당연히 또 사법부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고, 이에 루스벨트는 1937년 연방 법원을 자기 측으로 포섭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바로 의회에서 대통령이 연방 판사 인사권을 쥘 수 있게 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초강수를 둔 것. 당연히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으나 이는 연방 법원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당시 9명의 연방 판사 중에는 오언 로버츠(Owen Roberts)라는 중도적 성향의 공화당계 판사가 4명의 보수적 공화당계 판사들의 판결에 따라가는 형태로 과반수를 만들어 루스벨트의 정책들에 위헌 결정을 내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로버츠가 이때부터 다른 판결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위헌 결정을 받은 바 있는 최저임금제 관련 소송에서 합헌 쪽 과반수로 입장을 바꾼 것을 시작으로 이때부터 친 뉴딜로 입장을 변경, 이후 연방 법원을 친 루스벨트 성향으로 돌리게 됐다.

6.뉴딜정책의 결과

  •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정책들은 대공황이라는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던 미국 경제를 붙잡아 다시 회복세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1937년 GNP, 산업생산지수, 통화량 등 지표 기준으로 대공황 이전 수준까지 회복됐으며 실업률도 제법 낮추는 데 성공했다.
  • 루스벨트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의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희망을 주는 데는 성공하여 1936년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루스벨트 정권이 집권 2기 시작과 함께 맞게 된 것은 1937년 불황이었다. 불황의 원인으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경제 주기상 찾아오는 일정한 불황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케인즈주의자들은 뉴딜이라는 대규모 정책을 굴리면서도 적자 예산에 굉장히 민감하게 신경 써온 루스벨트를 비판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긴축 재정으로 뉴딜 정책을 오히려 지속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 어찌 됐든 덕분에 대기업 트러스트 해체, 노조 형성 등 뉴딜의 급진성에 불만이 있던 보수 세력에게는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꼴로 1938년 선거에서 공화당 보수 인사들이 상당수 의회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루스벨트와 대기업-보수 정치세력 간 갈등은 고조된다.
  • 그러나 불황이고 진영 갈등이고 뭐고 대공황 이상의 대사건이 터지니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1941년 참전과 함께 뉴딜 정책을 넘어 본격적인 전시 체제로 돌입하게 되고 전쟁 특수도 어느 정도 누리게 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게 된다. 하지만 뉴딜 정책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어서 TVA, 사회보장제도 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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