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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툽의 과거에서 찾는 경제 이야기

광란의 20년의 끝 < 검은목요일 >

by 이파브르 2023. 4. 12.

월스트리트의 대폭락 - 검은목요일

검은목요일-패닉
검은목요일 당시 모습

1. 검은목요일이란?

  •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은 1929년 뉴욕 증권시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주가 대폭락으로, 10월 24일 목요일(검은 목요일)부터 10월 29일 화요일(검은 화요일)까지 있었던 지속적인 주식 시장 붕괴를 말한다. 미국의 역사상 가장 큰 주식 대폭락으로 그 영향과 기간이 가장 컸던 사건이다. 9월 20일 있었던 런던 증권거래소 대폭락 이후 월스트리트 대폭락까지 이어지면서 12년 동안 서구권 전체에 엄청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2. 검은목요일의 배경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있었던 광란의 20년대는 부가 넘쳐나는 시대였다. 전후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농촌 시골 지역의 미국인들은 도시로 이사 가며 공업 부분의 급속한 팽창과 함께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였다. 미국 도시들이 번영하는 동안 농산물 과잉생산으로 인해 10여년 간 미국 농촌에서는 광범위한 재정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공업과 농업 부문의 극심한 차이는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의 원인 중 하나로도 지목된다. 곳곳에서 투기세 지적이 일어났지만 주식 시장은 영원히 상승할 것이란 생각에 빠졌다. 1929년 3월 25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과도한 투기세를 지적하자 투자자들이 빠르게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의 불안한 기반을 드러내며 작은 폭락 사태가 일어났다. 이틀 후 내셔널 시티 뱅크의 사장인 은행가 찰스 E. 미첼은 시장 불황 세를 막기 위해 신용 2,500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미첼의 이런 움직임은 금융 위기를 일시적으로 막았으며 콜머니는 20%에서 8%로 급감하였다. 하지만 미국 경제는 계속 불안한 모양새를 보여줬다. 강철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건설업도 부진했으며 자동차 판매량도 줄어든 데다가 소비자들은 쉬운 대출로 매우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었다.
  • 1929년 3월에서 5월 사이 일어난 경제 불황 신호와 소규모 시장 침체에도 불구하고 6월부터는 다시 주식 시장이 상승세를 기록하여 1929년 6월에서 9월 초 사이 다우 존스 지수가 20% 가까이 급등하는 등 떨어지지 않고 상승세를 이어갔다. 1929년 9월 3일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는 당시 신기록이었던 381.17포인트를 기록하며 9년 만에 대략 10배 정도나 상승하였다. 9월 20일, 런던 증권거래소가 영국 최대의 투자자였던 클라렌스 해트린 및 그의 동료 다수가 사기 및 위조죄로 투옥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폭락했다. 런던의 대폭락은 미국의 해외 시장 투자에 대한 낙관론을 악화시켰다.  대폭락으로 이어지는 날에도 시장은 심하게 불안정했다. 단기간의 대량 매도세로 인한 하락과 대량 매수세로 인한 상승 구도가 계속 반복되었다.

3. 패닉의 시작 - 검은목요일

  • 10월 중순 경부터는 매도세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검은 목요일이라 부르는 10월 24일에는 개장하자마자 이뤄진 대량의 주문으로 11% 하락으로 시작했다. 대량의 주문으로 인해 미국 전역의 증권사 사무실에서 시세표 가격 보고가 매우 늦어졌으며 투자자들은 대부분의 주식이 실제로 그 시각에 거래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며 시장의 공포감이 늘어났다. 주말 동안 검은 목요일 사건은 미국 전역의 신문에 다뤄졌다. 10월 28일 월요일(검은 월요일)에는 수많은 마진 콜이 들어오며 투자자들은 시장을 뜨기를 결정했고, 다우 지수는 이날에도 하락을 계속해 이날 하루에만 38.33포인트가 폭락하였고 폐장 시점에선 260.64포인트로 마감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29일 화요일(검은 화요일) 공포가 절정에 달해 매도세가 가장 컸을 때 이날에만 대략 1,640만 주가 거래되었다. 이날에만 다우 존스는 추가로 30포인트 더 하락한 230.07포인트로 폐장하였다. 이날 하루에 거래된 주식량은 대략 40여년간 깨지지 않았다. 10월 30일에는 다우 지수가 약간 복귀되어 28.40포인트 상승한 258.47포인트로 마감했지만, 이후에는 다시 하락세로 전환하여 1929년 11월 13일에는 다우 존스가 최저점인 198.69포인트까지 하락하였다. 이듬해 다우 지수는 지속해서 폭락 장으로 향하며 1931년 4월부터 1932년 7월 8일까지 수 %씩 하락하였다. 결국 1932년 7월 8일 20세기 주가 최저점인 41.22포인트를 달성하였고 주가지수는 1929년 9월 최고점 대비 총 89% 하락하였다.

4. 검은목요일의 원인

  • 1929년 월가 대폭락은 1920년대 후반 일어났던 투기적 호황세 직후 일어났다. 1920년대 후반에는 철강 생산, 건물 건설, 소매 매출, 자동차 판매, 철도 운송량 등이 매 기록을 경신하며 최대를 돌파하였다. 536개 제조업 기업 및 무역회사는 1929년 상반기 순이익이 1928년과 비교하여 36.6%가 증가하였다. 철강 생산량은 2배로 증가하였다. 이런 기록적인 수치는 수십만명의 미국인이 주식 시장에 투자하는 주식 호황세로 이어졌다. 이들 중 상당수가 더 많은 주식을 사기 위해 대출을 끼고 신용매매를 하였다. 1929년 8월까지 주식 브로커들은 구입하는 주식 액면가의 2/3 이상을 소액투자자들에게 대출해 주었다. 당시 85억 달러가 넘는 금액이 대출되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 내에서 유통되던 통화량 전체보다 더 많았다.
  • 주가 상승이 이어지면서 투자자들은 주식이 이보다 더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과 추정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면서 거품 경제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마진 거래로 인해 투자자들은 시장이 하락하거나, 심지어는 빠르게 상승하지 못하면 많은 돈을 잃게 되는 구조에 있었다. S&P 종합지수의 주가수익률(P/E)은 1929년 9월 기준 32.6으로[34] 그 당시 역사상 어떤 때보다도 더 높았다.
  • 또한 1929년의 작황 대호황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1929년 8월이 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의 밀 대호황과 호주의 밀 생산량 증가로 세계 밀 가격이 폭락하였다. 월가 주식도 이에 하락하였으나 싼 주식이 스태크(Stag)라 부르는 아마추어 투기꾼과 투자자를 몰리게 했다. 미 의회는 밀값 안정을 위해 1억 달러에 달하는 농민 구호금을 편성하여야 했다. 전 세계적인 공급 과잉으로 10월이 되면 밀은 부셸당 1.31달러까지 하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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